만리장성을 수식하는 말 중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표현은 "달에서 보이는 유일한 인공 건축물"이라는 것이다. 그만큼 그 규모는 상상하기 어렵다.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한 후 30만의 군사와 수백만의 농민을 징발하여 대량의 벽돌을 쌓아 장성을 연결해 현재의 장성 원형을 만들었다. 그 길이가 1만여리(당시의 1리는 약 400m)에 달해서 만리장성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기마민족의 침입을 막을 목적으로 만들었는데, 동쪽의 기점은 보하이 만에 면한 산하이관이고 끝나은 지점은 실크로드의 입구인 자위관으로 총길이는 6,000km이다.
현재 관광객에게 개방되어 있는 곳이 여러 곳 있지만,그 중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가는 곳은 베이징시 북서쪽으로 약70km정도 떨어진 빠다링장성이다. 이곳은 중국인 뿐만 아니라 외국인도 많이 찾아 일년내내 붐비는 곳이다. 빠다링 장성은 매표소 입구에서 보았을 때 오른쪽이 여관이고 왼쪽이 남관이다. 이렇게 이름 붙여진 이유는 왼쪽인 남관 쪽이 오르기 더 힘들기 때문이다.
산하이관(아래그림들)
자위관(아래그림들)
장성의 기원은 춘추시대의 제(齊)에서 비롯되어 전국시대(戰國時代)에는 연(燕) ·조(趙) ·위(魏) ·초(楚) 등 여러 나라가 장성을 구축하였다. BC 221년 진(秦)의 시황제(始皇帝)가 천하를 통일하자, BC 214년에 그때까지 연 ·조 등이 북변에 구축했던 성을 증축 ·개축하여, 서쪽의 간쑤성[甘肅省] 남부 민현[岷縣]에서 황허강[黃河] 서쪽을 북상하여 인산[陰山] 산맥을 따라 동쪽으로 뻗어 랴오둥[遼東]의 랴오양[遼陽]에 이르는 장성을 구축함으로써 흉노(匈奴)에 대한 방어선을 이룩하였다. 다시 한대(漢代)에 이르러 무제(武帝)는 BC 2세기 말에 영토의 서쪽 끝인 둔황[敦煌] 바깥쪽의 위먼관[玉門關]까지 장성을 연장하였다.
진 ·한 시대의 장성은 현재의 장성보다 훨씬 북쪽에 뻗어 있었는데, 그것이 현재의 위치로 남하한 것은 거란(契丹) ·돌궐(突厥) 등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즉, 북위(北魏)는 5세기 초에 장성을 보강하고, 중엽에는 수도 평성(平城) 부근에 또다른 성벽을 구축하였다. 또, 북제(北齊)는 6세기 중엽에 오늘날의 다퉁[大同] 북서쪽에서 쥐융관[居庸關] ·산하이관에 이르는 장성을 축조하고 다시 뒤이어 현재의 네이창청[內長城]에 해당하는 곳에 중성(重城)을 구축하였다. 한편, 오늘날의 허난성[河南省] ·산시성[山西省] 경계 북부를 타이항 산맥[太行山脈]을 따라 남하하는 장성도 북주(北周) 방어대책으로 그 무렵에 축조된 것인 듯하다. 그 후 수(隋)나라는 오르도스[鄂爾多斯] 남변에 장성을 구축했고, 당대(唐代)에 들어와서는 장성의 훨씬 북쪽까지 그 판도를 넓혔기 때문에 방어선으로서의 장성이 필요하지 않았으며, 또 오대(五代) 이후에는 장성지대가 북방민족의 점령하에 있었기 때문에 거의 방치되었다.
장성이 산하이관에서 자위관에 이르는 현재의 규모를 갖춘 것은 명대(明代)에 들어와서였다. 영락연간(永樂年間:1403∼1424)부터 보강이 시작되어, 정통연간(正統年間:1436∼1449)에 내장성이, 성화연간(成化年間:1465∼1487)에 오르도스 남변의 장성이 수축(修築)되고, 다시 가정연간(嘉靖年間:1522∼1566)에는 동쪽 일대의 장성이, 15세기 중엽∼16세기 초엽에는 오르도스 서쪽 끝에서 란저우[蘭州]를 거쳐 자위관에 이르는 장성이 완성되었다. 명(明)나라는 이 장성지대를 9개의 군관구(軍管區)로 나누어 구변진(九邊鎭)을 두고, 장성을 통과하는 교통요지, 즉 옌먼관[雁門關] ·쥐융관 ·구베이커우[古北口] ·장자커우[張家口] 등지에는 견고한 관성(關城)을 설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