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사하는 중국인들은 순자(荀子)에 나오는 ‘췬즈성페이이예 산자위우예(君子生非異也,善假於物也)’라는 말을 가장 좋아한다. ‘군자란 태어날 때부터 특별한 게 아니라 사물을 잘 이용하는 것이 다르다’는 뜻이다.
장사하려면 자기 돈으로 자본금을 대는 사람보다 남의 돈을 빌려서 부채경영을 하거나 심지어 남의 아이디어나 힘을 끌어다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심오한 교훈을 담고 있다.
중국에서 실제 남의 닭을 빌려 계란 장사를 하면서 밑천을 만든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물론 유교적 생각이 강한 베이징이나 산둥성 허난성 일부 사람들은 이를 민폐라고 여기기도하지만 대부분의 중국인은 이런 장사를 훌륭한 수완으로 생각한다.
광둥성의 유명한 무지개서점을 만든 인지강(殷繼鋼)의 사례를 들어보자.
어릴 때부터 책을 유난히 좋아했던 그는 나중에 큰 서점을 하나 경영해보는 꿈을 가지고 자랐다. 학교를 마치고 성인이 된 이후 책방을 내려고 했지만 돈도 장소도 없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남의 닭을 빌려서라도 계란 장사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시장 조사를 해본 결과 광저우 와이원수덴(外文書店)에서는 당시 홍콩 이민에 대한 서적과 토플시험용 교재가 장 팔린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바로 서점 대표를 만나 담판을 벌인다. 무작정 취직하겠다거나 장사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게 아니라 당당하게 서점 주인과 ‘윈윈’할 수 있는 협상을 한 것이다.
먼저 그는 서점 입장에서 많이 팔리기도 하지만 재고로 골머리 앓는 사실을 카드로 활용했다. 재고를 다 떠맡아 줄 테니 이민서적과 토플서적 판매를 대행하게 해달라는 제안에 월급쟁이 국영기업 서점 대표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이 두 가지 서적만 따로 팔아 단숨에 자본을 마련한 그는 꿈에 그리던 서점사업을 자기 것으로 만든다.
남의 머리를 빌려 창업한 케이스로는 중국에서 리징웨이(李經緯)를 넘어설 사람도 드물다.
그가 창업할 당시인 1980년대에는 중국에 스포츠음료란 게 별로 없었다. 리징웨이는 중국 남부 조그만 시골도시의 삼류 양조장 공장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때 까지만 해도 그가 돈을 벌거나 벼락출세를 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기 힘들었다.
월급이라곤 세 식구가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울 정도였고 동네마다 술 공장이 있는 중국 양조산업 형편상 그를 주목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람쥐 쳇 바퀴 도는 생활에 염증을 느낀 그는 1984년 로스엔젤레스 올림픽이 열리는 데 중국 대표단에서 공식 음료를 찾는다는 소문을 접한다. 보통 사람이면 스포츠 음료와 술공장이 무슨 연관이 있겠냐고 생각할 법도 한데 그는 달랐다.
광둥성 체육과학연구소 어우양샤오(歐陽孝)를 찾아간 그는 스포츠 강장음료 연구를 부탁한다. 100여 차례에 걸친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탄생한 음료가 바로 젠리바오(健力寶)다.
남의 머리를 빌려서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낸 그가 다음으로 한 작업은 시장을 만드는 일이었다. 마침 84년 5월 아시아 축구연맹 총회가 열리는 광저우 바이텐어(白天鵝) 호텔을 찾아갔더니 주앙 아벨랑제 당시 국제축구연맹총재도 참석한다는 소식을 알려줬다.
마음이 급해진 그는 총회에서 음료를 홍보하기로 마음먹었다. 절호의 기회를 잡았지만 아직 젠리바오라는 음료만 있지 상품화는 안 된 상황. 포장공장을 지을 형편도 시간도 촉박했다.
다시 머리를 짜낸 끝에 선전의 펩시콜라 공장을 찾아갔고 무턱대고 빈 캔을 빌렸다.
펩시콜라용 빈 캔에 젠리바오 음료를 담고 자기 상표까지 붙인 다음 꽌시망을 총 동원해 총회장에 젠리바오라는 음료를 비치했다.
마침 아벨랑제 총재가 음료를 들이마시는 장면을 기자들이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이 음료가 지구촌에 알려졌다.
젠리바오를 대규모로 키운 그는 중국이 낳은 세계적인 체조선수인 리닝까지 끌어들여 운동복 등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했다.
당시 로스엔젤레스 올림픽 체조경기에서 금메달을 휩쓸며 유명해진 리닝을 활용해 젠리바오그룹을 종합 스포츠업체로 발전시키는 계기를 만든 것이다.
남의 머리를 빌려 장사하는 중국식 마케팅 기법을 가장 잘 활용하는 곳을 꼽라면 단연 저장성 원저우지역이다.
가내수공업이 유명한 원저우에서 베이징 중점대학에 입학한 리하이우안이란 대학생 이야기다. 친구들 사이에서 옷을 잘 입는다고 소문난 그는 패션 감각으로 돈을 벌겠다고 마음먹는다. 겨울 방학을 마치고 베이징으로 올라오면서 여행용 가방 두 개에 카우보이 복장을 가져왔다.
장사를 해보지 않았던 그는 일단 베이징 자신의 다니던 대학 구내에 진열해 놓고 반응을 살폈다. 옷은 금방 팔렸고 그 자리에서 50여만 원을 벌었다. 자신을 얻은 그는 베이징 시내에서 땡처리 의류가게를 열었고 나중에는 원저우 공장 베이징 대표처 명함까지 마련해 옷장사를 했다. 공장 하나 없이 수요를 먼저 확보하고 이를 고향 공장에 신용 주문하는 방식으로 큰돈을 번다.
중국에서 비즈니스를 하려면 자본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자본을 끌어들이는 지혜와 담력 위험을 감수하려는 능력이 중요함을 잘 보여준다. 중국에선 부채경영이 일반화 돼 있지만 한방에 쓰러질 가능성도 있어 외국인이 따라 하기에는 신중한 선택이 요구된다.